변치 않는 마음을 지닌 이.........장순일

 

“여기서 뭐해요?”  남의 집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한테 지나가던 지인이 반가움에 물었다.
“여기다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해서.....” 사람들은 감탄스러운 풍경을 만났을 때 ‘그림 같은 풍경’이라고 한다.

그림 작가 장순일이 서울 성산동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1호에 그려 놓은 그런 그림이다.
담벼락에는 단풍이 곱게 물든 나무 세 그루 사이로 낮은 집들이 보인다. 
그 앞 넓은 공터엔 자전거가 세워져 있고 강아지 세 마리가 하릴없이 노닌다. 
내가 살고 싶은 집과 동네가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풍경화.어린이든 어른이든 자기만의 판타지가 있게 마련이다. 어린 시절 이발소에서 보곤 했던  액자그림 속에는 멀리 신선이  노닐 것같이 신비롭게 보이는 산과 그 아래 초가집이 자리 잡고 있다.  

현대판 민화다.
이런 그림처럼, 소행주 벽에 그려진 그림도 오가는 사람들이 볼 때면 가슴이 녹아내릴 것만 같다.
그림 작가 장순일은 대중 앞에 자기를 내세우거나 나서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꼭 있어야 할
곳에 끼어 있는 사람이다.   필요한 곳에 조용히 있어 주는 사람이다.
겸재정선미술관에서 열린 ‘아낌없이 주고 날아간 나비’ 전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전시는 열세 살 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2014년 아흔한 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한  황금자
할머니를 기리는 추모 기획전이다. 여기에서 장순일은 「한(恨)소녀의 외침 꽃비 되어 내리다」를 출품했다.
황금자 할머니는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해 군복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학생들이 입은 교복만 봐도 소리를
치며 평생을 힘들게 살았다. 
하지만 이를 이겨내고 당신이 배우지 못해 당했다며 평생 모은 재산을 학생들 장학금으로 내놓으셨다. 
장순일은  황금자 할머니의 고통스런  외침이 나눔으로 바뀌어  우리가 살아가는 온 세상에 퍼지는 것을 
꽃비로 형상화 했다.  2013년 민족미술인협회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만나고 할머
니들의 증언집을 보고도움을 받았다. 
여성작가만이 내보일 수 있는 섬세함으로 참혹한 전쟁에서 희생된 꽃처럼 아름다운 소녀들을 하늘로 날아
오르는 커다란 나비로 승화시켰다.  나비는 화폭에 담겨 있기도 하지만 광목천으로 나비 모양을 만든 뒤
한땀 한 땀 바느질로 작은 꽃 모양을 꿰어 환생하는 큰 나비 오브제로도 표현했다.
장순일은 바랜 사진처럼 어린 시절 몇 장면을 기억에서 떠올린다.
팔 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경상북도 영주와 예천중간에 위치한 평장개에서 아홉 살 무렵까지 살았다. 
형제들이 많아도 나이 차가 크다보니 언니  오빠들이랑  같이 어울리기보단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작은 마을에서 오빠와 장난꾸러기들은 얌전했던 장순일를 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 천 샛강에 풍덩 빠뜨리
기도 했다. 모래를 파내 깊은 웅덩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끔찍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장순일은 성격이 워낙 유순해서 그저 어린 시절 기억으로만 묵혔다.  고양 평장개 마을에서 학교는
5리 정도 되는 길인데 오다가다 보면 어떤 때는 놀다가 학교까지 못 가고 딴 데로 새곤 했다. 
마치 윤석중 시 <넉 점 반>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장순일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는 아이였다. 
놀이라고는 혼자 강가로 나가 천지에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  떼를  쫓아다니고 농사일이라고는  이삭이 
필 무렵 참새 쫓는 일이 다였지만, 산골 농촌의 그 모든 것이 몸으로 기억되는 시절이었다. 
그때 장순일은 한 학년에 두 반밖에 없는 작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방과 후에 집에 보내지 않고 
남겨서 그림을 그리라고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우직하게 남아 그려 내곤 했단다. 언니들이 한글을 가르쳐 준다고 책상머리에 붙잡을 때에는 줄행
랑을 치곤했다는데, 공부보다는 그림이 어린 장순일한테 훨씬 잘 맞았던 것일까?
장순일은 아홉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서울에 왔다. 여의도와 영등포를 잇는 다리 입구에 있던 해태상과 여
의도 비행장의 비행기들은 예천 산골에서 올라온 어린 소녀한테 낯설고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하지만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도 좋다 싫다 없이 그저 묵묵히 적응 해 갔다.
평소에도 새것보다는 헌 것, 낡은 것에 더 애착을 가진 탓에 장순일은 새 운동화를 사면 부러 바닥을 
문질러 닳게 만들어 신곤 했다. 동네 친구 하나가 그때 유행하던 가수 김추자 노래를 아이들 여럿 앞에서
요란하게 불러재끼는 모습도, 영등포시장에서 어른들이 물건을 사고팔며 속이고 바가지를 씌우는 모습
도 모두 조용히 하나하나 기억 속에 담아놓았다. 마치 문학작품 《양철북》속 주인공 어린이의 눈처럼.
그런 장순일을 결정적으로 흥미로운 세계로 안내한 시기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이 학교에는 특이하게도 공예과, 가정과, 상업과가 있었다. 이 가운데 공예과에 들어간 장순일은 데생, 수
채화, 도예, 칠보, 염색, 레터링, 디자인, 공예이론까지 미술 교과 과정을 두루 거쳤는데, 이 정도 수업이면
지금의 미술대학 정규 과정 수준이라고 이를 만하다.
몇몇 동급생들은 학교에 적응을 못해서인지 후회하는 이도 있었지만  장순일은 미술 분야별로 전문 교사
가 따로 배치된 3년 동안 누구보다도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다. 
장순일은 장학금을 받아 미술 재료를 사서 그림 작업에 열중했다. 
늘 조용해서 눈에 띄지 않게 생활해 왔던 그이로서는 자기 길을 찾은 듯했다. 
장순일이 지금까지 만들어 낸 작품들은 아주 다양하다. 
세상을 일찍 떠난 태아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태아령>이라는 작품은 목장갑 손가락으로 아이들 형상을
 하나하나 바느질을 해서 만들었다.  청바지나 가방,  자투리 천들을  미술작품으로  둔갑시키는 재주도 
예사롭지 않다. 
등산 양말이 물고기로 다시 태어난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해서 만든 꽃 그림은 마치 화폭에 그려 넣은 것처럼 섬세하다.
장순일은 웬만하면 둘레에 있는 것들을 죄다 이용하고 바라보고 만들고 그린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살 때에는 바깥 외출을 못 할 때가 많았다. 
이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그려 사람들한테 보여주기도 했다. 
어쩌면 그이의 작품 세계가 우리 생활 가까운 곳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에 더 공감을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깨진 자동차 사이드미러조차 그이 작품 속에서는 귀한 재료로 쓰이니 더 말할 것이 없다.
1999년 아이를 낳고 장순일은 문득 자기가 작업한 작품이 거의 다른 사람한테 넘어가 있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 자신을 위해 뭔가를 남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파뜩 들었다.
그 무렵 보리출판사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북녘에서 나왔던 《식물원색도감》 《조선식물원색도감1,2》 속 세밀화 그림을 수정하는 작업을 하면서 그림
 작가 장순일은 출판미술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 작업은 세밀화도감 《무슨 꽃이야?》로 출판되었다. 
그 뒤로 세밀화 도감에 실을 꽃과 풀들을 그리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고사리야 어디 있냐?》를 그리게 되면서  장순일은 자연과 생태를 아우르는 어린이 그림책 
세계에 몸담는다.
《고사리야 어디 있냐?》에 쓰인 표현 방식은 독특하다. 선과 색채가 유난히 선명한 빛을 띠고 있는데 여러
종류의 식물개체가 뚜렷하게 구분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풍경이 펼쳐진다. 
먼저 석판으로 화면 전체를 찍은 다음 담채로 색을 올리는 기법을 쓰다 보니 자연 생태화지만 석판특유의 
모던한 풍경화처럼 생생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책에 담긴 그림은 넓게 펼쳐진 고사리 밭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준다. 
고사리 키만 한 높이로 그려진 그림을 보면 자연그림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장대함에 탄성이 나온다.
“분야가 달라진다는 것은 곧 초보처럼 마음을 새롭게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작은 
지면에 작업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장순일이 말한 것처럼 화가가 그림책이라는 매체에 들어가
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여러 개체를 늘어놓아야하는 자연생태 그림은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데 이 일은 차츰 익숙해
졌다. 
익숙해졌다는 것은 타고난 드이 성품이 그림책으로 옮아갔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도토리는 다 먹어》를 거쳐 《호미아줌마랑 텃밭에 가요》는 실제로 성산동에서 동네 할아버지가 
개간한 텃밭을 여러 사람이 분양 받아서 직접 작물을 길러 본 경험이 녹아들었다.
앞으로 또 어떤 작업이 화가의 붓을 통해 나오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처럼 그이를 닮은 그림책이 적어
도 하나 이상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그림 작가 장순일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업을 해 왔지만 그림책이라는 장르도 이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보리. 정병규 글 중에서 발췌
 

장순일의 다섯개 방

2018년 3월 1일~3월 13일

​무국적 아트 스페이스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47-19(와우산로 27길)  우편번호 0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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