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항쟁 30년

낙원조국  

 

민주항쟁 30년동안 국민은 이방인처럼 보호받지 못하고, 위정자들은 국민을 상대로 정복자처럼 불의하였으므로

전시기간  2017년 6월 10일(토) ~ 7월 9일(일)  

  

참여작가 :

 

박영균 서수경 이상권 주재환 변대섭 박진화 김영중

최연택 송효섭 안만욱 이재민 신현경 황의선 김영진

나종희 박은태 김정헌 이성완 송용민 신은영 장순일

최경태 이인철 이원석 두시영 마C

6월 민주항쟁은 장기 독재정권을 이어가려는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에 맞서,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들고일어난 민주항쟁이다.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였으며, 헌법전문에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할 것을 적시하였다. 또한 국정조사권, 헌법재판소 설치, 지방자치제 실시 등의 내용을 담은 헌법으로 개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항쟁 30년 동안 국민은 늘 이방인처럼 보호받지 못하고, 위정자들은 국민을 상대로 정복자처럼 불의 하였으므로

낙원조국 참여작가들은 87년 6월 민주항쟁 전후부터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까지 국민적 분개사건의 현장을 누빌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작품의 내용면에 있어서도 작품이 대변하고자 하는 주체가 국민이며, 그 관점이 불의한 국가권력이다 

작가들이 이러한 관점에 구체성을 띠기 시작한 것은 1987년 1월 경찰에 의해 서울대 재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한 사건과, 같은 해 6월 9일 시위 참여 중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현장에서 쓰러진 이한열로 부터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6월항쟁 이후 대한민국은 낡은 제도를 개선하고 정치발전을 가졌왔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국민에 대한 억압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세월호 사건과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사건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것은 권력을 유지한다는 명분아래 그 구성원을 억압할 수 밖에 없는 권력의 수구적 인식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낙원조국 작가들은 국가폭력에 대한 치열한 투쟁의 한 복판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으며, 이들 작품에는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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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월

 

2017년 태양이 뜨거운 6월이다. 1987년 6월... 그 뜨거웠고 숨막혔던 순간들이 다시 기억난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뒤늦게 군복무를 하게 된다. 87년 6월에는 특공연대란 곳에서 병장으로 군복무 중이었고 당시 연세대학교 뒷산에 은거지를 구축하고 시위 가담자 모두 때려죽이라는 군의 명령을 받았다.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이 글은 모두가 사실임을 밝히며 이 글을 이어가고자 한다.

 

연병장엔 육공트럭들이 병사들이 사열 하듯 부대원들을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대 뒷산까지 가져갈 실탄 및 부식과 텐트를 실고 있었다. 장비는 군부대 뒷산에서 잘라온 1m 길이의 참나무으로 만든 진압봉과 이미 지급된 투명방패, 앞 그라스가 투명인 전투헬멧과 k1소총을 착용하고 흐르는 땀으로 폭동진압 훈련이라고 하는 것을 수도 없이 하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실고 갈 실탄도 모두 준비된 상태다. 부대원들은 6월 항쟁 수개월 전부터 실시된 진압훈련을 모두 마쳤고 차만 타고나면 연대 뒷산에 부대원들은 은거지를 구축하고 작전에 투입하게 된다.

 

나에게 6/10민주화운동 진압군으로서 역사에 기록될 만행의 산 주인공으로서 기록되어야만 하는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몇 일간의 대기상태가 계속되었다. 차라리 출동하였으면 하는 바램도 드는 긴장감의 연속... 나의 87년 6월은 그렇게 뜨겁게 가고 있었다. 지루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계속되는 출동 대기 상태가 길어지고 긴장감 또한 무뎌지기 시작할 무렵 군내 방송으로 음악과도 같은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출동이 다행스럽게도 취소되었단 소식이었다.

무혈항쟁으로서 국민이 승리한 최초의 항쟁으로 기록 되었듯이 출동명령은 긴 기다림 속에서 취소되었고 연병장의 육공 트럭들은 하얀 흙먼지를 날리며 멀리 사라져 갔다.

안도의 한숨과 다행스러움으로 나는 기뻐했고 부대원들도 역시 다행스럽게 여긴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경찰이 아닌 군부대가 출동하기 위해선 계엄령이 선포되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군이 출동하여 진압한다는 것은 제2의 광주민주화운동에서와 같은 학살의 만행이 또다시 서울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아주 중대한 일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나의 젊음은 6월 항쟁이라고 하는 초대형 사건 앞에 그렇게 놓여 있었고 87년 6월은 그렇게 지나갔다.

 

오늘은 세월이 흘러서 2017년 6월이다. 지난 겨울 촛불집회로 박근혜를 파면시킨 역사적 성과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다. 6월 항쟁이 최초의 무혈항쟁으로 기록 되었다면 무려 30년이 지나고 시작된 메이져급 촛불집회는 광화문에서 문화가 함께하며 더욱 성숙되고 완성된 시위문화의 결정체로 거듭난다.

과거 이명박 정부의 광화문 컨테이너 장벽 설치 사건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이명박 잡으러 가야지 하는 생각이 앞서기만 한다.

 

나는 촛불대신 다시 붓을 잡아야만 한다.

광화문에서 만나 우정과 정의의 실천은 뒤로하고 붓을 잡고 나가야 한다.

​이재민

1. 70년대 모더니스트들의 예술은 이 땅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예술은 브루주아 아파트 거실의 벽지가 되어 그들의 고급 취미가 되었다.

몇몇이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고, ‘민중’은 아방가르드가 되었다.

당시의 작가들은 70년대 주류의 길을 따라 걷거나, 또는 ‘전사’가 되어 견고한 벽을 향해 온 몸을 던졌다. 벽은 귀퉁이가 허물어지기도 했고, 더럽혀 지기도 했다. 어디에선가 “이제그만” 이라고 외치자 벽에서 물러서기 시작 했고, 그대로 박제가 되었다.

또 다른 아방가르드 전사들이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2. 당시의 화두는 ‘민중’ 이었다.

‘희망’이라는 신천지를 향해 가던 몇몇 이들은 깃발을 내리고, 모든 것을 정리 했으며, 그 훈장으로 명예와 부를 얻었고,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구체적인 삶으로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게 아파트와 자동차를 구입했으며, 남아있던 이들은 끝이 없는 싸움에 세월을 저당 잡힌채 힘겹게 ‘희망’이라는 허구의 산봉우리를 향해 지금도 걷고 있다.

제도권 화랑과 미술관들은 과거 불온시 했던 민중미술에 때깔 좋은 옷을 입혀 브랜드를 만들었고, 박물관에 가두어 버렸다.

96년 ‘노동자목판화’전시 이후 나는 4년 정도를 놀았다.

2003 쌈지스페이스 개인전 작가노트

                                             

최경태

왜 지금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부활시키는가. 과거로부터. 역사를 , 그 오랜 상처를 . 지난 감정을 온통 또다시. 그것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그것을 불러일으켜 잊혀진 역사를 망각 속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말과 영상 속에서 또다른 말과 영상을 조각조각 끄집어내어 잊혀진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이다.

차학경의 『딕테』 클리오의 역사 중에서

2016년 겨울 우리는 기나긴 망각 속에서 깨어나 다시 촛불을 밝혔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열망으로 다시 저항한다. 우리는 벌써 4.19라는 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망했으며 5.18 민주항쟁을 겪으면서 스러져가던 민주주의 불꽃을 되살리려 온몸으로 저항했다. 마침내 그 불꽃의 의지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다시 발현 되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잊혀진 역사를 망각 속에서 다시 되풀이 하고 있다는 처절한 자각을 하면서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망각 하는가, 많은 이들의 희생과 상처를 딛고 일어선 새로운 역사의 시간들을 ...

황의선

민주주의는 긴 어둠의 터널처럼 요원하다.

숭고한 희생정신이 없다면 더더욱 요원하다.

무릇 박종철, 이한열 등 젊은이들의

불의와 맞서 거룩하고 순결한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이만큼 민주의 빛이 발하고 있다.

이젠 잔인한 4월도 훌쩍 넘어갔으니

6월의 빛을 노래하면서 행진하자.            

 

이성완

켜켜이 쌓인 찌든 때, 구석 구석 눅눅히 썩은 공기들 다 모조리 몰고 사라져다오

이제 청량함으로 물들자.                  

 

이원석

거리에서 싸웠던 청년들 강경대열사가 백주대낮에 공권력에 의해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을때 우리는 분노했고 그 이후 많은 열사들이 분신했던 기억이 있다.

강경대 열사 장례식날, 시청 앞에서 노제를 지내려고 하는 유족과 학생들과 시민들, 이대 앞에서 운구행렬에 최루탄과 곤봉으로 막는 공권력.

이대 앞에서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화염병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박영균

​작업노트

세월호 사건의 진상 규명이 될 때까지 이 땅에서 바다 끝까지, 팽목항에서 전국으로 촛불을 활활 불태우겠다는 다짐의 메시지와 애도의 마음을 담아서 표현했습니다

 

신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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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협에서 6월 항쟁 30주년 기념 전시가 무산되어 섭섭하던 차....급작스런듯 하지만 비슷한 취지의 전시 제안에 기존 작품도 무방하다 하여 언뜻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땅한 작품을 찾을 수 없었다. 부산으로 친구들도 놀러와 정신을 빼던 차...시내 관공버스를 타러간 사이 꽂아두었던 스케치 북을 빼 펼쳤다. 어지러히 세월호로 작업하다 남은 자국들을 가지고 아무 생각 없이 4B 연필을 들고 칠해나갔다.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막막하기만 하다.

 

87년 6월에는 큰 아이 혼자 키우느라 씨름을 하던 때였을 것이다. 졸업하자마자 오빠가 하시던 사업이 망하여 집도 날아가고 부모님은 이민을 가시게 되었다. 나는 대학 내 함께 했던 짝지와 결혼을 선택했다. 당시만 해도 언론에 내비치는 정치나 뉴스에 관심이 없던 나는 그 여름에 대한 기억이 감감하다.

아이들 다 키우고 곁을 떠날 무렵 사회단체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내게는 대학에 들어가 우연히 참여했던 탈춤반 선배들이 우르르 잡혀 들어가 감옥에서 나온 후 변했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반짝이던 그들의 젊은 이상은 하얀 그림자를 남겼다. 그 기억들을 붙잡아 두고 있다가 하나씩 꺼 집어내어 놓는다. 광화문 촛불 집회에 나갔다가 태극기 집회에 나간 언니를 만날 뻔하기도 했다. 몰상식이라고 몰아대기에는 언니가 품고 있는 기억들에 대한 상채기를 낼 수 없어 입을 다물곤 했었다. 625를 겪은 언니들 세대의 경험에 70년대 운동권 선배들 이야기를 아무리해도 이해 하려하지 않았다.

 

어버이날 선물도 없느냐고 다음날 아들한테 따지는 전화를 하니 엄마가 부산 내려가고 없어서 그랬다며 그래도 선물을 했단다. 문재인 대통령이 된 것도, 자신이 문재인 대통령을 찍은 것도 선물이란다. 맞다. 정치적 견해도 종교적 견해도 다를 때는 주로 입을 다물었던 나는 한 번도 문재인 대통령을 찍으라는 말도 못했지만 엄마의 뜻을 알아 채린 아들 녀석이 고맙다. 할 말은 많아서였는지 내 그림에는 말이 많다.

 

오늘 아침 “박근혜 퇴진과 예술행동” 텔레그램에 올라와 있는 서울 민미협 이재민 샘의 체험을 보고는... 적어도 시각이 다른 남의 생각을 배려하여 입을 다물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더군다나 큰 아들은 재민 샘이 군복무 중 은거지를 구축했던 연세대를 나왔다). 625 전쟁 세대의 기억과 6월혁명과 촛불혁명을 겪은 세대의 기억은 이렇게 다르다고...

텔레그램에 있는 사진에서 실루엣을 그리고, 안에 텅 빈 공간에 그의 체험을 써놓았다. 그의 87년 6월과 2017년 6월의 이야기를....

 

​신현경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47-19(와우산로 27길)  우편번호 0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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